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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야심한 밤에
2007년 10월 01일 (월) 박복진 기자 korimex@korea.com

올 여름 비는 유난히도 많이 내렸습니다. 폭염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민망할 정도로 햇볕은 맥을 추지 못하고 구름 언저리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시작 된지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그래서 이제는 들판의 곡식이 늦게라도 햇볕 맛을 봐야 알갱이가 영글텐데 비는 오늘도 주룩주룩 내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의 한가운데 수요일 저녁, 낮일을 끝내고 바로 귀가하지 못하고 이어진 저녁모임, 그리고 지친 몸을 철푸덕 ! 지하철 빈 의자에 쑤셔 앉히고 마찬가지로 지친 군상들의 귀가를 멀거니 바라봅니다. 종점에서 내려 몇 안되는 승객들의 심리적 귀가 상한선인 자정에 쫒기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나도 발걸음을 독촉합니다. 식구들이 깰새라 조심, 조심 아파트 현관문을 따고 들어와 내 방문에 들어가면서 옷가지들을 한 꺼풀씩 뱀 허물 벗듯 벗어던지고 욕실에 들어갑니다. 하이얀 비누 거품에 쌓인 피로도 같이 쓸어 내려가고 있는 착각을 가지며 얼마를 더 오래 그러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내 지친 육신을 침대에 누이기 전에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서 등교를 합니다. 매우 규칙적인, 매우 절제된 금속성 소리, 켜놓은 컴퓨터를 식혀주는 쿨펜 소리가 가느다랗게 이어집니다. 학교의 교문이 열리고, 강의실의 출입문이 열리고, 이미 입장해서 공부를 끝내고 나간 학우의 빈 의자를 땡겨 나도 그 자리에 앉습니다. 필통을 열어 필기구를 주섬주섬 꺼내고 머리 위에 쓰는 강의 청취용 리시버를 머리에 올려 쓰고 존경하는 교수님의 입장을 기다립니다.

교수님의 입장이 늦어져서 강의실의 옆 창문을 열어 서브 메뉴를 살짝 열고 잠깐의 해찰을 해 봅니다. 내가 이 강의실에 들어올 때 보지 못했던 학우들이 저랑 같이 이 강의실 의자에 앉아있네요. 동일 학습자 명단, 지금 이 시간 강의를 듣고 있는 학우들의 명단이 있네요.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시각, 이 야심한 밤에 나랑 같이 강의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나와 같은 학우님. 나는 내가 이 분의 존재를 알았듯, 이 분도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얼른 자세를 고쳐봅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창밖을 봅니다. 바깥은 캄캄한 흑밤입니다. 내가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앞 동의 창문 불빛 몇 개는 이미 소등이 된 듯, 내 앞에는 캄캄한 흑밤의 어둠뿐입니다. 비는 가늘어졌지만 아직도 조금씩 흩뿌리고 있습니다. 방충망의 테두리 부분에 빗방울이 튀겨서 방충망의 가는 구멍에 걸친 빗물이 대롱대롱, 아 ! 성능이 좋은 사진기로 찍으면 작품이 되겠네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이 모습을 잡을 수 있는 성능 좋은 사진기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지금 나랑 같이 이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우님께 지금 이 시각 내 방의 모습이라고 보내주었으면 좋겠네요. 사랑과 영혼이라고 번역된 외국 영화, The Ghost 에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하나는 이승, 또 하나는 저승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애틋한 장면. 그래서 벽에 붙은 동전 하나를 위로 올리어 나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 나는 내가 지금 그 학우와 같이 있다는 존재의 일치를 이 사진을 보내어 증하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강의실, 이 의자 옆에 다른 학우님이 앉아있는데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없습니다. 설혹 말을 건넨다하더라도 그건 입김이 담긴 육성이 아니라 자판을 두둘겨 기계가 만든 신호로 보내는 문자일 뿐. 그래서인가요, 동질감이 더하고 솟는 애정이 애달아 걷잡을 수 없네요. 전화로라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하는 마음, 그러나 시간이 이미 그런 무례를 허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학우님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시고 이렇듯 야심한 밤에 강의실에 들어오셨을까. 늦은 시각, 저녁 식사는 챙겨드시고, 지금 이 강의는 금주 중 들어야할 마지막 강의일까? 아니면 이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또 다시 다른 강의실로 줄달음을 쳐야할까? 올 여름은 어떻게 보내셨을까? 모두가 휴가라는 단어에 목숨을 걸고 도시 탈출을 감행할 때 학우님은 이를 어떻게 외면하셨을까? 아, 학우님. 지금 강의를 듣고 있는 학습자라는 글 옆에 표시되어 있는 비표 하나로 님의 존재로 표시되는 게 참으로 애절하고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학우님에 대한 애틋한 이 감정이 더하나 봅니다. 이 밤에... 이 늦은 밤에... 야심한 밤에 나는 내 옆에 있는 학우를 느낍니다. 학우의 호흡을 듣습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주경야독의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 모두가 편하고 쉬운 하루일과를 짜고 있지만 님은 그와는 반대로 고단하고 힘들고 무거운 하루를 선택하셨습니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온 몸을 던졌습니다.

밤은 우리에게 생각할 사고의 폭과 깊이를 줍니다. 그래서 야밤에 하는 학습은 강의의 내용과 함께 강의 외적인 영역도 넘나듭니다. 내 눈길이 아까 보았던 방충망에 튀긴 대롱대롱 빗방울을 다시 봅니다. 가는 모눈종이 칸막이 같은 방충망, 그 속을 채운 빗물 방울. 거기에 반사된 아파트 보안등의 희미한 불빛. 그 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빗방울 속에서 이동합니다. 무생물이 살아서 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갈라진 학우의 호흡이 바로 귓전에 느껴집니다. 나랑같이 의자를 더 가까이 하고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같이 느낍니다. 아, 이 밤에... 이 야심한 밤에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내 옆에 같이 나란히 앉아있는 학우가 있는 한 외롭지 않습니다. 강의실에서 바라보는 바깥, 이 야심한 밤에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동일 학습자, 이 시각 강의 출석자, 학우님. 나는 님을 보며 님의 모습을 저 방충망 모눈종이에 그리고 있습니다. 이 밤에. 이렇듯 야심한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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