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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비밀상자 2
2007년 11월 01일 (목) 서은희 기자 silvereh@hanmail.net

“아빠, 나의 하늘 2”

딸이 아홉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딸에게 작년 크리스마스는 정말이지 가혹했다. 눈이 오는 듯 하더니 이틀 내내 비가 왔기 때문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역시 눈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산타복장을 하고 파티를 하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하루 전 출장을 핑계 삼아 빈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딸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아빠의 긴 설득 끝에 받아들였고 선물 사오는 것 잊지 말라며 아빠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 딸은 언제나처럼 산타의 선물을 바라며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분주해졌다. 아빠의 당부대로 집안 여기저기 풍선을 달고 트리장식에, 선물준비까지. 그동안 아빠는 산타복장을 하고 목소리 변조에 여념이 없었다. 혹여나, 딸이 알아챌까봐 두근거리는 가슴은 마치 방망이로 그를 치는 것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자정. 엄마가 딸을 깨운다. 거실에 산타가 왔다는 말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서둘러 나온 딸을 보는 아빠는 그만 피식 웃음이 날 뻔 했다. 완벽한 산타와 좋은 선물로 딸은 너무도 행복해했다. 노래와 춤, 마술쇼로 진행된 2시간 가량의 파티는 털옷에, 수염까지 붙인 아빠에게는 조금 고된 것이었지만 딸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피로가 한번에 가셨다.

아홉 살, 그 나이에 산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나 역시 당연히 산타는 나의 꿈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홉 살의 나의 크리스마스에, 나는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산타의 역할을 하는 아빠를 보며 고마움과 미안함, 행복감을 느꼈다.

처음 딸이 교복을 입던 날을 아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도 커버린 딸이 자랑스럽고 대견하여 그 벅찬 감동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아빠는 사춘기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빠와 축구 얘기를 할 때면 사내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함께 얘기를 나누던 딸이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방에서 아빠와 공유하기 힘든 랩음악을 듣거나, 누구에게 보내는지 모를 편지를 쓰고, 때때로 시험 때면 스트레스에 식사도 못하는 모습이다. 아빠는 언제나 딸에게 강조하곤 했다. 공부는 중요하지 않고, 건강이 최고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아빠는 네 뒤에 기다릴테니 지체없이 오라고...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아빠는 그저 딸의 사춘기가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딸은 불고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빠가 직접 만든 불고기에 된장찌개 하나면 밥 한 그릇 후딱 치우는 딸 때문에 딸이 고3이 된 최근 들어 아빠가 부엌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아빠는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딸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오는 10시만을 기다린다. 아빠는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아직도 나는 아빠가 해주는 불고기와 된장찌개 맛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는다. 지금도 가끔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잘 믿지 않는다. 하긴, 딸과의 저녁식사를 위해 10시까지 쫄쫄 굶고 있는 아빠가 세상에 별로 없긴 하지. 사춘기라는 어려운 시기를 아빠 덕분에 극복해 나갔던 것 같다.

요즘 들어 세상에 무서운 사건이 TV뉴스에서 속출한다. 여대생 납치, 살인 사건 등 유난히 여대생에 관련된, 듣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사건에 아빠는 해만 지면 안절부절 못한다. 겨우 대학교 2학년생인 딸 걱정에 잠을 못자고 늘 거실에 대기하고 있다. 딸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입생이 들어왔다며 매일 늦는다. 한 달쯤 지나자 아빠의 인내심은 폭발했다. 작년엔 딸이 신입생이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온 딸에게 한 시간 가까운 한바탕 연설을 한 후에야 아빠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면서 잠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빠는 딸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세장에 걸친 편지에는 아빠의 걱정을 이해하지만 학교생활도 조금만 이해해달라는 진심이 담긴 내용이 쓰여 있었다. 아예 통금을 12시에서 10시로 변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던 아빠는 딸의 편지를 받은 후에야 딸이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여전히 딸이 들어오지 않은 밤에는 잠이 안 오는 건 사실이다.

이때가 첫 번째 아빠와의 트러블이었다. 아빠는 매일매일 거실 쇼파에서 책과 함께 나를 기다리셨다. 아마도 2, 3일에 한번은 새로운 책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그땐 정말이지 너무도 답답했다. 보통의 딸들이 이런 문제로 전쟁을 택하지만 나는 편지라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고, 아빠는 언제나처럼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직장을 잘 다니던 딸이 갑자기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어느 날, 아빠는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곱게 키워 좋은 남자 만나 결혼했으면 했는데, 머나먼 타국에서 공부를 한다니 쉽게 허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안다. 어릴 때부터 아빠 말이라면 하늘이라고 생각하던 딸이지만 때때로 자기가 옳다고 믿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딸이라는 것을. 그런 성정 또한 그를 닮은 부분이다.

오늘은 딸의 유학선언 후 일주일이 지난 일요일이다. 결국 딸의 뜻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빠는 딸의 미래를 위해 보내준다는 말을 하려고 가족들끼리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의 가족외식에 아빠는 깔끔한 면도에, 말끔히 차려입고 향수도 잊지 않았다. 한참 외출 준비를 하던 아빠는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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