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3.3.15 수 13:37
> 뉴스 > Break Time
     
‘소설보다 이상한’ (Stranger Than Fiction, 2006)
2007년 12월 01일 (토) 박찬 기자 joanstrife@cufs.ac.kr

이 이야기는 ‘해럴드 크릭’이라는 남자와 그의 손목시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셈에 매우 능통하며 대단히 과묵한 남자다.
그는 12년 동안 출근 때마다 32개의 이를 정확히 76회 닦아 왔다.
좌, 우로 38번, 아래위로 38번.
그는 12년 동안 출근 때마다 더블 매듭이 아닌 싱글 매듭의 넥타이를 함으로서 매일 43초의 시간을 절약했고
12년 동안 출근 때마다 그는 블록 당 57걸음의 속도로 정확히 6블럭을 달려 아침 8시 17분 버스를 딱 맞추어 탄다.
12년 동안 출근 때마다 그는 미국 국세청의 중견 직원으로서 7,134건의 세무 서류를 처리했고 45.7분의 점심시간을 가지며 4.3분의 커피 타임을 그의 손목시계로 칼 같이 맞춰 지켜왔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 혼자 퇴근했고,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매일 정확히 23시 13분에 잠자리에 든다. 그가 자기 전에 하는 유일한 행동은 책을 읽는다거나 이런 저런 잡생각에 뒤척인다거나 하는 일이 아닌, 단지 손목시계를 침대 옆에 두는 것뿐이다.
물론 그것은 수요일 이전까지다. 수요일에 그의 손목시계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요일은 왔다.
누군가 ‘해럴드’에게 물어봤다면 그는 이 특별한 수요일이 이전의 수요일과 똑같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그는 늘 그랬듯이...

“......?”

그는 늘 그랬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한...

“......?????? 여보세요?”

“......??...”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한다. 일반인들은...

“이봐요. 거기 누구 있어요?”

......일반인들은 출근 날에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거나 자신의 꿈이 드디어 실현될 거라는 공상도 하지만 ‘해럴드’는 그의 칫솔질 횟수만 세고 있을 뿐이었...

“좋아! 누구예요? 방금 ‘해럴드는 그의 칫솔질 횟수만 세고 있을 뿐이라고 한 사람이? 내가 그걸 세고 있는 줄 어떻게 알죠? 이봐요?”...
여기까지가 ‘해럴드’와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해설하고 있는 해설자와의 첫 만남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트릭을 쓴다. 3인칭 시점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고 관객들은 마치 신의 입장에서 지켜보듯이 주인공을 해설해 주는 해설자가 원래부터 설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칫솔질을 하던 주인공 ‘해럴드’가 해설자의 나레이션을 들어버리는,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림으로서 영화는 시작된다.

‘해럴드’는 미 국세청에서 12년을 근무한 중견 직원이다. 그는 숫자에 매우 능하여 어지간한 대여섯 자리 수의 가감승제 암산은 콧방귀를 뀌는 시간보다 빨리 풀어낼 정도니까. 계산기를 두드리기 귀찮아하는 그의 동료들은 틈만 나면 ‘해럴드’를 불러 뭐 곱하기 뭐는? 이라고 묻는 것이 이젠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회 어느 곳이든 숫자와 사랑하고 친해진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없다. 그도 직장에서 ‘데이브’를 제외하고 친구는 없다.

어느 수요일, 그는 아침에 양치질을 하다가 문득 자신을 누군가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나레이션을 듣는다. 자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난 니가 어떤 행동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느니라’라고 하듯, 일거수 일투족을 때려 맞추는 나레이션 때문에 ‘해럴드’의 아침은 12년 만에 처음으로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동료가 내는 (‘해럴드’ 입장에선) 아주 간단한 곱셈 문제도 신경이 거슬려 맞추지 못했다.

“이봐. ‘해럴드’ 67 곱하기 453은?”

동료가 67 곱하기 453을 물었을 때...

“어... 잠깐. 당신이 얘길 하니까 계산이 안되잖아요!”

...그는 답을 계산해 낼 수 없었다. ‘해럴드’는 30,351이라고 바로 답했다.

“뭐?”

“아. 30,351이야”

하지만 진짜 답은 31,305인...

“잠깐, 잠깐. 31,305네. 미안해.”

그는 곧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쫒기고 있다고 금방 불안해 하지만 그러고 있을 틈은 없다. 쌓여있는 체납자들을 찾아가서 세금을 징수해야 하니까.

‘해럴드’는 제과점의 주인이 세금을 고의적으로 미납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제과점 주인인 ‘파스칼’을 만나게 되었고 ‘나라에 세금을 바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불쌍한 이웃을 돕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언변과 좌중의 압박에 꼬리를 내리고 후일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절정의 섹시한 몸매와 ‘프렌치 키스’의 ‘멕 라이언’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귀여운 외모, 별가루에 생매장 당했다가 방금 파 해쳐진 것 같은 눈부심이 그를 흔들었기 때문인데 12년 경력의 ‘해럴드’도 시각적인 자극에 금방 쓰러지는 사람은 아닌지라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파스칼’이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상상만 하다가 실패하고 도망치듯 제과점을 빠져나온다. 근엄한 척? 하면서.

그 순간 ‘해럴드’는 괴로워하고 자신에게 분노했다. 제과점에서 나와서는...

“셧 업! (Shut up!)"

...저런, 엄한 하늘을 저주했다.

“아우... 나는 너를 저주해! 이런 멍청한 목소리야앍!”


이쯤에서 색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옥상 난간에 서서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듯한 포즈로 발아래의 세상을 보는 것을 상상하는. 담배는 밥 먹듯 피워대지만 꽁초는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 준법 아줌마 아닌 금발의 준법 아줌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이플’. 적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궁극의 작품실력을 가진 자폐증세를 보이는 소설작가다. 그녀는 수년동안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작업의 막바지 단계에서 그녀는 소설속의 주인공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자신의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죽음의 수단과 방법을 궁리하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항상 궁극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을 죽여 왔으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해럴드’가 저주했던 멍청한 목소리와 너무나 비슷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돕기 위해 회사에서 파견한 비서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해럴드 크릭을 죽을 방법을 모르겠어.”

더욱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해럴드 크릭’이고 소설속에서 지금 그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 ‘해럴드’는 퇴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목시계가 마치 어업 탐사선 무궁화 13호가 동해 바다에서 회오리를 만나 좌초하듯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해럴드’는 그저 시계가 고장난 줄로만 알았다. 시계가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추며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때 맞춰 건너편에는 그의 마드모아젤, ‘파스칼’양이 우아한 평상복 차림으로 국세청을 들르려 하고 있었기에. 시계는 필사적이었지만 결국 실패했고 결국 멎어버렸다. 주위 동료가 6시 18분이라고 알려준 시간대로 그는 시계를 리셋해 다시 시간을 맞추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에 엄청난 일들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그것이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뭐? 뭐라고? 이봐! 이봐요? 뭐라고요? 왜요! 왜! 내가 왜 죽는데요? 이봐요? 듣고 있어요?”

‘해럴드’는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분명히 난 죽는다고 말했다. 또 그 목소리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만한 불행한 소식이 또 있을까?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 목소리가 내가 죽는다고 말했을 때, 그것만큼 불행한 소식이 또 있을까...

여기까지 내용으로 봐서 알 수 있듯이, ‘해럴드’는 히트 소설가, ‘아이플’의 미완성 걸작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현실화 된 것이다. 둘 다 현실 속에 있다. 한쪽은 자신의 소설이 현실로 적용되어 있는 줄을 알지도 못하고 ‘해럴드’를 죽임으로서 작업을 마치려 하고, 한쪽은 ‘자신은 곧 죽는다’는 해설자의 말로 인한 불안감을 떨치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지금까지의 내용만을 말한 것만으로도 스포일러의 성향이 다분하다. 아니, 이 영화는 아예 처음부터 그 내용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영화를 엄청나게 즐기는 필자는 주변에서 ‘볼만한 영화 좀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거짓말 좀 보태서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듣지만 이 영화만큼은 대략의 내용이라도 말할까봐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왜냐고? 이미 보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해설자가 알아서 영화의 내용을 알려줘 버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굉장한 고민이 있었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긴 하나, ‘꼭 보세요들!’ 이라고 딱 한마디 적어둘 수도 없잖은가. ‘마감을 팔아 우리의 보는 즐거움을 빼앗다니!’라고 말하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이 영화는 이처럼 모든 것이 다 아이러니하다. 내용부터 시작해서, 추천해주고 싶어도 어떻게 추천하는 것이 가장 옳을까 하고 고민하는... 영화를 보고 난 이후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망설임 없이 이번만큼은 제대로 스포일러가 되어보기로 했다. 아니... 최대한의 감동이 될 만한 부분은 남겨두고 자잘한 것만 말하겠다.

사실 영화의 결론은 두 가지로 나뉘고 그것은 초반 20분 안에 다 드러나 버린다. 하지만 ‘아이플’이 어떤 방법으로 ‘해럴드’를 죽일 것인가? 에 대한 기대는 영화의 끝 부분까지 계속되는데... 주인공이 죽으면 영화가 끝나는 것이 당연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해럴드’가 언제,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다. 굉장히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오래도록 살았던 ‘해럴드’의 인생이 어차피 끝날 것이라면 이것이 희극으로 끝날 것인가 또는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가 중요하기에 영화는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 문제에 대한 열쇠로 제과점 주인인 ‘파스칼’을 등장시킨다.

두 케릭터가 처음 대면할 땐 딱 보기에도, 상큼발랄한 ‘파스칼’과 하루 종일 숫자만 세고 있는 고리타분하고 매력 없는 비극의 주인공 같은 ‘해럴드’ 사이에 어떤 급진전은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파스칼’은 ‘해럴드’의 삶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해럴드’는 직감하고 얼마 남았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삶을 ‘파스칼’로 하여금 조금씩 희극이라는 물감으로 색칠해간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꽤 큰 재미를 준다. 왜냐하면 반대쪽에서는 ‘아이플’이 여전히 어떻게 ‘해럴드’를 죽일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아 고심하고 있기 때문에 의외의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해럴드’가 ‘파스칼’과 진한 사랑에 빠졌을 무렵에 결국, ‘아이플’과 ‘해럴드’는 현실에서 서로 만난다. ‘해럴드’는 ‘아이플’이 쓰는 걸작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고 그 모든 것이 현실로 발생하고 있으며 ‘아이플’이 주인공의 죽음을 결말로 쓴다면 자신 역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놀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 버리고 싶다는 눈빛을 교환하며 그렇게 둘은 만난다.

‘해럴드’는 자신의 인생을 전에 없던 희극으로 점점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아이플’의 머릿속에 정해진 소설의 방향은 비극. 결국 ‘아이플’은 작가이기 때문에 ‘세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역사와 후대에 길이 남을 비극을 위해 스스로 희극을 쓰고 있는 ‘해럴드’에게 절망을 안겨주며 그에게 죽음을 선사해야만 했다. 천재적인 작가 ‘아이플’... 그녀는 소설가일 뿐, 살인자는 아니었기에 그녀도 ‘해럴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죽어야 역사에 남을 걸작이 완성된다. 하지만 ‘해럴드’는 자신의 인생을 뒤늦게나마 희극으로 바꾸어가고 있었고 그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해럴드’는 곧 느낀다. 자신의 인생을 희극으로 바꾸어 간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곧 죽음을 면하기 위한 댓가로 희극적인 인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럴드’는 깨닫게 되고 ‘아이플’이 쓴 마무리가 덜 된 소설의 원본을 하루 종일 버스 안에서 끝까지 읽어보면서,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던 ‘아이플’을 위해 자신의 죽음만이 이 소설을 위대한 걸작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직접 그녀에게 전하며 자신의 의연한 죽음을 원했고 그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소리 없게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정리하며 죽음을 기다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해럴드’의 생사여부는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해럴드’와 ‘아이플’의 입장은 어찌 보면 모 아니면 도, 이것 아니면 저것, 엄마 아니면 아빠, 까투리 아니면 장끼, 짜장 아니면 짬뽕과 같은 상황이라서 어느 한쪽만 살짝 힘을 더 주어도 쉽게 넘어가는 문제였기 때문이고 ‘아이플’이 결정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말해)영화는 매끄러운 결론을 맞는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자. 여러분이 ‘해럴드’고 나는 여러분들을 종이에 써내려가는 ‘아이플’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당신과 내가 만났다. 나는 당신이 내가 팬을 굴리는 그대로 현실 속에서 살아왔음을 알고 엄청난 미안함과 회의에 휩싸인 패닉 상태고 당신을 소설 속에서 죽여야만 내 이름이 박힌 걸작이 완성되며 이미 어떻게 죽이는 것이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앞뒤가 척척 맞는지도 생각해 두었기에 당신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부디 염려 말고 나를 죽여서 세상에 영원히 남을 걸작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망설임 없이 내게 말 할 수 있는가? 아니, 반대로 나는 당신에게 ‘영겁의 작품을 위해 제발 죽어주세요.’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팔자가 당신을 백만장자의 자식으로 썼고 당신이 매우 호화스러우면서도 지저분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가차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한 번에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각자, 하지만 각자의 의견이 엇갈리면 두 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해럴드’는 실제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다. 때문에 ‘해럴드’가 겪는 심적인 부담과 고통은 현실의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변에 인생은 곧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함께 보라고. 그러면 항상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한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과 반드시 함께 보라는 나의 바람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기분 좋지만 묘한 기분을 주는 영화다.

인류에겐 희극보다는 비극이 걸작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지금껏 역사 속에 남아있는 작품이나 역사서가 많다. 그만큼 희극보다는 비극이 쉽게 잊을 수 없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비극. 슬픈 이야기.

하지만 세상에 기억되는 비극 중에 걸작들은 슬픔 이후에 절대적인 기쁨을 준다는 것.
때문에 인생이 비극이고 고통스럽다며 오늘 당장 울부짖더라도, 당장은 기쁨을 얻을 수 없더라도 그것에는 이유와 의미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말 것.

ⓒ 미네르바(http://minerva.cufs.ac.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로 107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02450) | Tel) 02-2173-2580 Fax) 02-966-6183 | 청소년 보호 책임자 : 조기석
Copyright 2004 Cyber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nerva@c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