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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민족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세계에 알렸던 '안중근'
2012년 12월 31일 (월) 박성민 기자 smpark@jkn.co.kr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인생 과정을 살펴보는 것을 흥미로워 한다. 때문에 평론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최근 안중근의 인생 과정을 살펴보게 됐다. 계기는 '사진 한장' 때문이었다. 안중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달된 것들과는 무관하게, 그 사진 한 장은 내게 '장군'의 면모를 볼 수 있게 했고, 그를 매우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 분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문에 기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싶은 것들만을 쓰고자 한다.

사실 안중근은 너무 영웅적인 면모가 강조되어(사형당하는 순간까지 당당했다는 그에 대한 기록에서 보듯)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자 또한 이 인물에 대해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까지의 생각까지 들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분도 군인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이처럼 굳어진 생각은 조금은 달라지게 된다.

당연히 그의 인생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로서 평가된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다.

왜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을까. 당시 일본 제일의 정치적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한국 침략을 주도한 자였으며 2천500만명의 아시아인들을 학살하는 침략을 이끈 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이나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는 비스마르크나 청나라의 리홍장에게 비교될 만큼 존재감이 큰 국제정치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인의 식민지배 내면화는 더욱 확산됐을 것이다.

안중근의 투쟁은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시켰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가 망국(亡國)의 낭떠러지에 몰려 있을 때 이 민족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린 이였다. 안중근의 투쟁이 가진 커다란 역사적 의미는 이런 것들이다.

안중근은 거사 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그의 15가지 죄들을 열거했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다.

현재까지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안중근이 왜 일본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바로 재판의 불법성 문제인데, 당시 하얼빈은 청(淸)나라 소속이었지만 러시아에 조차돼 있었다.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사법권 아래 있었다. 러시아 당국이 안중근을 먼저 수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사건 발생 14시간 만에 안중근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인도한다. 이에 대해 일본의 집요한 공작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염려한 러시아 당국의 고려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 관할건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당시 미조부치 검찰관은 "하얼빈이 중국소속이지만 동청철도 부속지인 동시에 공개지로 청국에 대해 치외법권을 가지는 각국은 이 지역에서 자국 신민에 대해 법권을 가진다"며 "명치 38년(1905년) 11월 17일 일한보호조약(을사늑약) 제1조에 따라 한국 외에서의 한국신민 보호는 제국 관헌이 집행하게 되어 있다"고 관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관선 변호사조차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마다 변호사는 "(한국민에 대한 재판은) 소위 외교 위임을 초월한 입법권의 위임"이라며 "적용해야 할 법은 한국 형법"이라고 변론했지만, 일제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본 학계도 재판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있다. 도쓰카 에쓰로 류코쿠대 교수(법학)는 "안중근 의군참모중장 재판에서 재판소가 검찰관할권의 근거로 삼은 1905년 한국보호조약은 유효하게 체결되지 않았다"며 "그 결과 (일제) 재판소에는 관할권을 내세울 법적 근거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박귀언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는 "당시 일제의 재판은 법정신이 아닌 철저한 정치논리에 따라 진행한 것이어서 원인무효라는 게 의식 있는 학자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재판에서 국제법 적용이 배척된 점도 잘못됐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형사범죄로 규정했는데, 당시의 한일관계로 볼 때 이는 억지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8월 강제해산되고 의병만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당시는 실질적으로 무력투쟁이 존재했다. 안중근은 당시 교전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만국평화회의의 규정에 따라 교전 자격을 갖춘 안중근은 국제법상 포로로 대우받아야 했다.

안중근 본인도 "자신의 거사는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敵將)을 포살(砲殺)한 것"이라고 밝히며 "따라서 자신은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재판 과정에서 공정성을 상실했다. 변호인 선임도 관선변호사로 했고, 변론권도 방해했다. 학자들은 일제의 행위는 어떠한 정의도 담보하지 못했다고 공감하고 있다. 학자들은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 재판에 합법성이 없었다"며 "주권을 짓밟는 적의 수뇌를 사살한 사건을 변호권도 박탈된 상태에서 재판한 것은 비정의적인 행위"라고 강조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였다. 만 3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이와 같았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에 대해 언론과 학계에서의 많은 평가들이 있지만, 기자가 보는 안중근은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개인의 안위 보다 뜻을 위해 산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말에서 그의 정신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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