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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일제치하에서 순결한 영혼의 기록 남긴 '시인 윤동주'
2012년 11월 28일 (수) 박성민 smpark@jkn.co.kr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의 문체 때문이었다. 윤동주를 통해 접한 '-게다', '-게외다' 등과 같은 표현 양식 그리고 그의 문체는 한 사내에게 필력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에게 있어서 그의 '시'가 한 인물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겠으나, 한 인물을 더 잘 알고자 한다면 그의 전 인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의 일생을 살펴볼 때 분노를 느끼게 됐고, 그래서 촛점을 맞춰 다루고자 한 건 그의 '마지막 생애' 부분이다.

나온 주장에 의하면,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하나 일제의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사인은 계속된 식염수 주사로 인해 잦는 혼수상태 속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잔인한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그의 인생이 짓이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1945년 2월 16일 만 27세의 나이, 해방을 6개월 앞둔 시점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그는 순국했다.

◆일본 유학 중 사상범으로 특고경찰에 체포…2년형 선고 받아

   

    릿쿄대학 시절 일본 유학 첫 해인 1942년 잠시 귀국했던 때의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송몽규(앞줄 중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답답한 현실을 뛰어넘으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했다. 그러나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 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유학시절 윤동주는 민족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고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한글 사용이 금지됐음에도 일본 땅 한복판에서 한글로 된 시를 썼다.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건 1943년 7월 14일. 도지샤대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귀국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됐다.

죄목은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가장 문제가 된 송몽규와의 관계 외에도 친구들에게 '의식화 작업'을 계속한 것이 일제 치안당국에 포착되어 문제화 됐다.

조선 안의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 폐지를 논의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 유발에 부심하고, 장성언과 접촉하여 1942년 10월 1일 총검거가 시작된 '조선어학회사건'을 두고 안타까워하고 그의 민족의식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자기가 소장한 '조선사개론' 책을 빌려주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유지하고 앙양시키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일경은 그에 대해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비국민(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 서구 사상이 농후하다는 것 등으로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세웠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된다. 석방 운동은 엄두조차 낼 형편이 못되었다. 일제의 일방적인 올가미 속에 완전 방치된 셈이었다.

   
윤동주 판결문(1944.3.31, 교토지방재판소). 일본 교토지방재판소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감시·탄압 절정 이르러

그 당시는 수시로 경찰이 하숙방을 뒤지고 끽하면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시절이다. 모두가 숨죽였던 시절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날만 새면 전선으로 끌려나가는 출정군인과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는 병사와 백골로 돌아오는 전몰군인의 행렬을 쉽사리 대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국인 학도병들의 유골 행렬, 무언의 귀환을 대할 때마다 거꾸로 피가 끓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허무주의적인 의식 속에 빨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날마다 불길하고 우울한 소식만이 전해졌다. 전황도 급박하고 불리했지만 반사적으로 한국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무차별 체포, 구급이 자행되고 있었다. 근대사의 암흑기 절정이었다.

윤동주도 우울했다. 벽에 부딪힌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더욱더 말수가 적어지고 쫓기는 자의 심정이 되어갔다.

◆의문의 주사 투여…일제의 잔인성에 '생체실험' 제물돼

1945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함께 소감중이던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윤영춘씨의 회고담은 이렇다.

"시국에 관한 말은 일체 금지라는 주의를 받고 복도에 들어서자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50여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왔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 왔느냐고 묻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하고 말을 흐렸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송몽규 또한 3주 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했다.

문제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의문의 주사다.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가 '바닷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되고 있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 확인 결과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 명은 산 채로 해부된 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 규슈제국대학에서의 생체실험을 다룬 소설이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샤쿠(遠藤周作)의 '바다와 독약'이다. 이 소설은 규슈제대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다루고 있다. 소설 중에는 생체실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첫째, 소금물을 사망할 때까지 주입 둘째, 혈관에 사망할 때까지 공기를 주입 셋째, 폐를 제거해 사망할 때까지 호흡 한계 조사'.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일본인 간수들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신 기증이 예정됐던 곳 역시 규슈제대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그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였건 간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생체실험'의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일제의 잔인성이 다시 한번 온 세상에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연희전문 4년, 일제치하 현실에서 내적 방황·역사의 무게 시로 표현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다.

연희전문 4년은 일제 치하의 참담한 현실에 눈 뜨는 과정이었다. 그의 고뇌와 갈등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고 시인은 졸업을 전후해 내적 방황과 역사의 무게를 시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고,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어 당시 그의 내면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윤동주 나름의 시 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4년여 동안 '별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2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폭넓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던 '휴머니스트'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정직하고 맘씨가 깨끗할 뿐 아니라 폭넓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소설가 장덕순씨는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도 자기는 회의와 일종의 혐오로 자신을 부정하는 휴머니스트다.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시작에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장덕순씨는 윤동주와의 한 일화를 전했다.

"내가 전문학교에 입학시험 보러 상경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나를 위해 하숙방을 얻어 놓고 역까지 마중나왔다. 저녁 늦게까지 내 하숙방에서 이야기하다가 그는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나갔다. 아마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여독을 풀자고 자리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밖에서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깼다. 그가 다시 온 것이었다.

방에서 냇내가 나니 창을 좀 열고 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내가 들창문을 좀 열어 놓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어두운 신촌 굴길을 타박거리고 더듬어 갔다. 뒤에 들으니 그는 가깝지 않은 기숙사까지 다 갔다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왔더라는 것이었다. 그 방에는 학생 하나가 냇내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동주가 '너는 아늑한 호수에', '나는 험준한 산맥'에 있겠다는 그 시심과도 같은 일화다.

◆정병욱과 강처중으로 인해 윤동주 시인 세상사에 알려져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윤동주의 시집이 엮어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1941년 11월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추가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를 3부 필사해 그 하나는 윤동주 자신이 갖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선생이, 남은 한 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이양하 선생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작품 가운데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등이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 아니라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미리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뤄지게 된다.

정병욱과 강처중은 윤동주의 개인사에서 하나의 행운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서 필사본 시집 1부를 받아 잘 보관했다가 해방 후에 세상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윤동주가 맡긴 시고 가운데서 정병욱에게 건넨 작품만이 살아남아 1948년 정음사에서 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검거된 지 반 년 후에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 그는 윤동주의 시고를 그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윤동주가 살아 올 때까지 소중히 지켜 주기를 당부했었다. 만약 윤동주나 자기가 죽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거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는 그 시고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행히 그는 살아서 무사히 귀가했다. 그때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놓으셨다.

이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까지의 경위다.

또 강처중은 일본 유학을 떠나는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의 원고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나머지 시 원고들, 일본유학 중 보내온 편지 속의 시, 그리고 그의 책들, 연전 졸업앨범, 앉은뱅이 책상 등 모두 챙겨서 보관했다. 일본 땅에서 쓴 윤동주의 시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불과 5편뿐이며, 모두 동경이다. 그 시들은 강처중이 편지로 받아 보관된 뒤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해방이후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윤동주의 유고들을 정리해 한 권의 유고시집을 출간해 낸 인물이다.

◆형무소 수감으로 많은 원고 상실됐으리라 예측

처음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에 대해 그는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원고가 산실된 부분이다. 감옥에서 취조 형사는 그가 쓴 조선어로 된 시와 산문들을 모조리 일본어로 번역을 시켰다고 한다. 윤영춘씨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잠깐 그를 만났을 때 어깨너머로 본 원고 뭉치는 꽤 부피가 큰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때 취조실에 놓여 있던 그 원고들이 지금 전해진 유고로 다 수렴됐는지 여부는 미심쩍은 일이며, 아마 많이 산실됐으리라고 예측된다.

◆윤동주 시인, 순결한 영혼의 기록 남겨

   
서울 종로구 청운동 연희전문 자리에 들어선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에 대해 어떤 언론인은 "온 겨레가 함께 노래할 명시(名詩) 한 편을 얻자면 한 세대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두 세대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바로 그 '명시'로서의 비중을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유로운 공기를 단 한 번도 마시지 못했던 '윤동주 시인'.

그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 순결한 넋이 극한에 다다른 제국주의자들의 광기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비록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애로 우리 곁을 떠났지만, 윤동주는 아마 이 나라 땅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인이 된 듯하다. 윤동주 시인은 자기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어둠과 대결하려 했던 한 순결한 영혼의 기록으로 남았다.

한편, 지난 7월 2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연희전문 자리에 '윤동주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학교가 소재했던 종로구에 들어선 '윤동주 문학관'은 그의 영인본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시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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