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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을 아는가
2012년 06월 25일 (월) 박성민 smpark@jkn.co.kr

 

"혹시 노근리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시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요."


한 일반 시민의 답변이다. 기자 또한 AP 통신의 한국인 기자가 노근리사건에 대해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이 사건은 6·25전쟁이 터진지 얼마되지 않은 1950년 7월 26일 정부와 미군의 채근을 받아 강제로 피난길에 오른 주곡리 및 인근 마을 주민 수백여명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에서 미군에 의해 살상당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사진1] ▲노근리 쌍굴다리

 

7월 23일 당시 미군들은 '이 마을은 전장이 될 위험이 있으니 오늘 중으로 모두 피난을 가라'고 했고 주곡리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채 영문도 모르는 피난이 시작되었다.


주곡리 주민들은 임계리로 옮겼고 임계리에는 이미 수백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미군들은 임계리에 있던 피난민들을 4∼5㎞ 떨어진 하가리까지 이끌고 갔다. 한밤중이 돼서야 피난주민들은 하가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그들은 미군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대구쪽으로 가는 국도로 따라 피난을 계속했다. 피난민들이 서송원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미군들이 나타나 피난민들의 길을 막고 경부선 철도 위로 올라가게 했다. 피난민들은 철도를 따라 노근리 지역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짐을 풀게 하고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위험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짐 검색이 끝나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고, 이때 미 전투기 2대가 폭탄을 쏟아 붓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Kill them all'(모두 죽여라). 1950년 7월 24일 제8기병연대의 통신일지를 통해 밝혀진 사건 발생 당시의 실제 명령어다.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미군 1기갑사단 예하부대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는 명령을 받고 29일까지 3일 3야 70시간 동안 가두어 놓고 피난민들은 폭격기와 기관총으로 어린이 등 농촌 주민에 무차별 총격과 폭격을 계속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군들은 굴다리 인근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터널 안쪽은 물론이며 대피하기 위해 뛰쳐나오는 피난민들에게도 무차별로 총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177명, 실종자 20명, 부상자 51명이며 생존자들의 증언으로는 약 4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폭격이 지나간 자리는 바로 '생지옥'이었다. 피난민들은 살려달란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벌레처럼 죽어갔다. 이같은 살상은 29일까지 벌어졌다. 총격이 끝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닌 전선이 밀려 미군이 퇴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쌍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총알 세례를 받았던 5백여명의 민간인 가운데 겨우 스물다섯 남짓이 목숨을 건졌다. 삼일 밤낮 동안 노근리 철길과 쌍굴터널에 퍼부어진 총탄 숫자는 12만개였다. 노근리사건 조사반의 보고서에 의하면 살해된 피난민중 83%가 부녀자와 노약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건 당시 노근리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양해찬씨의 증언을 들으면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전해진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난민 중 갓난아이가 자꾸 우는데 그 소리 때문에 총격이 계속됐고, 사람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아이 아버지가 갓난아이를 물웅덩이에 수장시켰다고 증언했다.

 

사슴이 숨어 있는 부락이라 하여 녹은(鹿隱)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때 부락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노근(老斤)으로 바뀐 노근리는 참혹한 현장으로 변했다.


이 범죄는 전쟁통에 묻혀 있었고 1953년 휴전과 함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사건이 세상에 묻혀있는 동안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다시 암흑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미궁에 빠질 뻔한 범죄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책의 저자이자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씨이다. 그는 유족들의 비극을 묶어 1994년 4월에 실록으로 출간하면서 이를 다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사진2]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 스틸

 

처음 미군은 '노근리에 주둔한 적이 없다'라고 발뺌했다.

 

1999년 AP 통신이 기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미군 제1기갑사단과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보도한 기사가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지난 2001년 1월 미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2004년에야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참혹한 살상은 피난민 사이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이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믿고 미군에게 전원 사살 명령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당시 한 미군 위생병은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의심스러운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엄명이 떨어졌다'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상황의 앞뒤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지금도 왜 미군이 피난민을 향해 총을 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무장 양민을 향해 왜 기관총을 난사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미군은 밝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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